다말을 통해 나타난 구속사의 영광(38 장 묵상)
37 장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계시되고 그의 팔려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는 구속사의 전 과정이 바로 요셉의 버려짐과 수난이라는 모형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유다가 가나안여인을 취하여 자녀를 낳고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자손을 얻는 사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갑자기 유다의 이야기로 전환한 것은 요셉과 함께 구속사의 한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혈통을 지키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하란까지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보를 지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일탈로 낳은 가나안 후손은 죽어야 했습니다. 유다는 세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장자 엘을 죽이십니다. 성경은 그가 악을 인해 죽었다고 했으나 실은 거룩한 계보에 부적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들을 구원할 여인의 후손이 오실 때까지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은 율법으로 규정해서라도 계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둘째 오난도 상속 문제로 손해를 감수하기 싫어서 땅에 설정(泄精)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후손을 출산할 수 없는 죄인들의 버려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립니다. 그 이유가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의 방해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다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유다는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오시기로 된 유다지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했고, 계대결혼으로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했으며 아내가 죽은 지 겨우 30 일이 지났는데 창녀를 찾았습니다.
유다와 달리 다말이 창녀 취급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약속의 후손의 대를 이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이기뻐하시는 의로운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위해 멸시를 감수하셨듯이말입니다..
거기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흠을 찾아서 구속사의 메시지를 훼손시키는 것은 무지가 아닌 악의입니다. 사람의 철저한 불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수모를 통하여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고야 말게 하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