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묻혀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23장 묵상)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아브라함은 마침내 사랑하는 사라까지 떠나보내면서 증인들 앞에서 굳이 매장지를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지만 그가 매장지를 구하는 과정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의 죽음을 해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적통계보가 모두 거기 묻힌 것은 믿음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특별히 주석을 단 것은 마므레는 ‘부활’을 의미하고 헤브론은 ‘교제’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죽어 매장되는 자리가 부활의 자리이고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교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지나는 길은 자기를 묻으며 지나 온 자리입니다. 나를 묻은 자리는 눈물과 고통이 있는 골짜기이지만 거기가 샘터가 된다고 고백합니다(시84:6). 자기가 죽은 자리에서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교제는 사람끼리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은 귀중히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시116:15). 거기서 생생한 활력을 되찾고 교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인정받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봉사와 교제는 잠시 동안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부인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봉사와 교제는 이삭을 바친 예배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 없는 교제, 희생 없는 헌신, 자기를 죽음에 내어줌이 없는 관계는 천박합니다. 자식도 자기 내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키우면 커서 멀어지게 됩니다. 성도의 교제도 누군가는 묵묵히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묻은 자리가 마므레였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주님과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리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곳은 평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부르고 교제하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죽는 자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시는 자리입니다. 죽음(무트)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완성이란 뜻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기꺼이 자신을 드려 부활의 권능을 경험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빌3:11).